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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청지기 날짜    2011-11-15  (조회 : 903)
이곳은 탈북자들이 살아온 고향에 대한 진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곳입니다.
[ 하고싶은 말 보내기]

『나도 여자예요, 내가 북한 여자란 걸 저주해요』( 1 )
김수희 2004-04-30 10:52:16, VIEW : 382

-나에게도 꿈이 있었어요

나는 1980년에 함경북도 회령군에서(지금의 회령시) 태어났어요.
내가 태어날 당시 아빠는 회령군 담배공장에서 기계기사로 일하셨고, 엄마는 회령군 고등중학교 음악교원을 하셨어요. 탁아소와 유치원 시절에 엄마의 영향으로 나는 악기 다루기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유치원을 마칠 때는 손풍금을 가지고 아무 노래나 다 반주할 수 있었거든요. 인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도 부모님들의 엄한 통제 속에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항상 학교 서클 小組(소조)에 편입되어 손풍금과 플루트를 다루었어요. 우리 엄마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예술학교에 보내어 앞날의 연주가로 키울 거라 다짐했어요. 학교 서클 소조에 편입되어 춤과 노래를 준비해가지고, 아빠가 일하시는 담배 공장이나 외삼촌이 일하시는 탄광기계공장에 공연하러 다닐 때는 참 재미있었어요. 내가 치는 손풍금 반주에 맞추어 독창, 중창 노래가 울려 퍼질 때면 관중들의 박수 소리는 그칠 줄 몰랐고 세상의 사랑을 다 받고 사는 것 같았어요.

1990년 당시 북한에는 지금의 중국처럼 사탕, 과자 같은 간식은 없었어도 집에서 자체로 달인 옥수수엿을 맛있게 먹으며 공연했거든요. 그러나 예술가가 되어 현란한 무대 위를 누벼보려던 나의 꿈이 점점 깨질 줄은 어찌 알았겠어요. 내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95년부터는 무서운 식량난이 들이닥쳤어요. 배급소에서는 식량을 주지 않아 밥을 해 먹을 수 없었어요. 매일 배급을 주겠나 하여 엄마는 선생질을 하는 바쁜 속에서도 짬시간에는 배급소에 달려가야 했어요. 엄마가 수업할 때면 할 수 없이 내가 수업에 빠지고 배급소 앞에 가 혹시 쌀을 주겠나 기다렸어요. 보름내 기다려야 이따금씩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를 실은 자동차가 배급소에 오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주는 건 1~2㎏의 옥수수가루뿐이었어요. 이 가루는 한 끼에 우리 식구가 한 숟가락씩 먹어도 모자라는 양이거든요.

엄마와 나는 오전에는 학교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회령시의 주변 산들을 다 돌아다니며 독이 없다는 풀들은 다 뜯어왔어요. 풀을 삶아서 가루 몇 숟가락씩 넣고 저어낸 풀죽은 그래도 맛이 괜찮았어요.

중국땅에서 지금 먹으라면 열두 번도 더 토했을 그 풀죽이 그때에는 왜 그리도 맛있던지, 중국에서 기르는 돼지들도 그런 죽을 잡아먹힐 때까지 한 번도 못먹어 볼 거예요.

-아빠·오빠는 식량 구하러 떠나고…

담배공장에 다니는 아빠와 회령 교원대학에서 공부하는 오빠는 점심 끼니로 가루에 풀을 비빈 풀범벅을 항상 가지고 다니곤 하였어요. 그 점심 도시락감이 너무 많이 들어 엄마와 나는 항상 맨 풀을 우려낸 물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어요. 우리 엄마는 참 목소리가 좋았어요. 처녀 시절에 청진제철소 예술선전대에서 독창만 내내 하며 박수갈채 속에 살아왔다는 엄마거든요. 어머니는 우리 회령시 고등중학교 음악교원을 하면서, 나이들어서도 늘상 노래를 달고 다녀 많은 노래 공연에서 상을 탔어요.
그런 엄마가 수업하러 들어오셔서는 노래할 힘이 없어 한두 마디 노래를 우리 학생들에게 배워주고는 더 부르지 못하셨어요.

잡숫지 못하니까 목이 꺽꺽 막혔거든요.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옆의 학생들에게 부끄러웠어요. 옥수수알 한 줌만 삶아먹어도 우리 엄만 노래 열 개쯤은 잘 뽑아낼 수 있을 거라고 동무들에게 많이 설명하였어요. 이런 우리 가정에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어요. 1996년 8월이었어요. 먹을 것이 없어 출근 못하시게 된 아빠와 대학교 공부를 임시 중단한 오빠가 양강도 혜산 쪽으로 녹말가루를 구하러 가게 되었어요.

거기에 가서 넓은 대흥단벌의 수확한 감자밭을 뒤지면 감자 이삭이 나온다는 데 그걸로 녹말 가루를 바꾸어 집에 가져오겠다는 것이었어요. 또 아빠는 떠날 때 담배공장에서 퇴근하시며 조금씩 가져와 모아두었던 담배 개비를 반 배낭 가지고 떠나셨어요. 우리 엄마와 나는 아빠와 오빠가 식량 한 배낭을 가득 지고 집에 들어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어요. 하지만 한 달 가고 두 달 지나 양력설을 맞는데도 떠나가신 아빠와 오빠는 돌아오실 줄 몰랐어요. 찾으러 떠나려고 해도 어디 간지 모르는 형편에 어떻게 찾겠어요. 동네 사람들은 外地(외지)에 나가 굶어죽지 않았으면 중국 쪽으로 脫北(탈북)했다는 것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더는 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배워줄 형편이 되지 못하여 사직하시구요. 먹지 못해 공부하러 못 나오는 학생들이 70%를 차지해 선생들도 많이는 필요치 않았어요. 더욱이 지금 실정에 음악 선생은 없어도 된다고 엄마가 사직하실 때 교장 선생님이 귀띔해 주어, 엄마는 너무 분해 하루 종일 울었어요. 그러면서도 나만은 학교에 꼭꼭 보내셨는데 정말 배가 고프니 공부할 생각이 전혀 안 나더군요. 학교에서 내가 늘 치던 손풍금 위에는 먼지가 더덕이 되어 들어앉았고 우리 서클조는 활동을 멈춘 지 2년이 지났어요. 전에는 우리 학교 학생이 45명 빼곡히 들어앉던 교실에 학생이 열 명도 되나마나 하여 다른 학교 교실에 같이 모여 공부했어요.

이 기간에 우리 가정은 재봉기와 녹음기, 입을 만한 옷가지들을 옥수수와 다 바꾸어 먹었어요. 1년이 지난 1997년 8월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게 된 나의 앞길은 캄캄해 보이기만 하였어요. 엄마는 떠나가신 아빠와 오빠 때문에 정신적 타격과 육체적 부담에 앓아 누우셨어요. 『중국 쪽에 脫北했으면 식량이라도 보내오겠는데』하고 엄마는 중얼거리셨건만 소식은 없고, 보위부나 안전부에서는 계속해서 행처를 대라며 못 살게 굴었지만 우린들 어찌 알겠어요. 망태기가 된 가정에 엄마 병구완도 해드리고, 졸업도 하게 된 나는 그래도 연주가가 될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청진 예술전문학교를 지망했어요.

그런데 청진 예술전문학교는 나라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신입생들을 받지 않는다는 통지가 내려왔어요. 뭐 식량이 없어 외지 기숙사생들은 받지 못한다나요. 이렇게 몇 년도 안되는 어간에 꿈도 희망도, 가정도 다 깨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요. 설상가상으로 졸업한 지 한 달 후인 1997년 10월에, 엄마는 심한 영양부족으로 당뇨병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어요. 운명의 마지막을 예감하신 엄마는 이런 유언을 남기셨어요.

『수희야. 어떻게 하든지 너는 살아서 아빠·오빠를 찾아내고, 좋은 세상 구경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단 말인가』

사망한 엄마를 땅에 묻어 드려야겠는데 제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아빠가 일하시던 회령 담배공장에 가 보았으나 너무 죽은 사람이 많아서 棺(관)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나는 악을 썼어요, 우리 엄마를 땅 속에 편히 묻지 못하면 나도 같이 죽겠다고 결심을 다지며 집에 있는 이불장을 뜯어내 톱으로 썰고 칼질을 하며 혼자서 棺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어디서 전해들었는지, 오빠가 다니던 회령 교원대학의 동창생들이 열 명 남짓 우리집에 들이닥쳤어요. 고마운 오빠와 언니들은 나와 같이 울면서, 돈도 모으고 쌀도 모아 관을 마련하고 쌀떡도 한 접시 해왔어요. 대학생들은 농촌 쪽에 나가 소달구지도 얻어와 어머니 屍身(시신)을 실어 내갔어요. 엄마를 회령시 유선구 쪽으로 가는 산 옆에 묻던 날 어디서 나타났는지 「꽃제비」들이 한 무리 다가왔어요. 엄마가 가르쳐주던 우리 학교 학생들이었는데 모두 거지 차림을 하였어요.

「꽃제비」들은 어디서 훔쳤는지 빌렸는지 술 한 병과 국수 두 타래를 속옷에 가지고 와서 내놓았어요. 대학생과 옛 중학교 학생들은 엄마 앞에 술을 붓고 절을 하였어요. 나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학생들은 운명이 너무 서러워 실컷 울었어요. 울고 난 뒤에는 모두 모여 쌀떡 반 개씩 나누어 먹고, 「꽃제비」들에게는 가져온 국수를 모두 삶아 먹였어요. 지금 내가 나의 신세를 한탄한다고 해서 나의 불행만이 아니에요. 이런 건 全(전) 회령시가 겪는 불행이었어요. 무정한 세상에서 살아갈 길은 누구에게나 막혀 버렸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홀몸이 된 나는 직업을 구하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녀 보았어요. 회령 담배공장, 회령 곡산공장을 비롯한 큰 공장들과 장공장, 농기계 수리 공장 같은 작은 지방 산업공장들도 다 찾아다녔지요. 가는 곳마다 원료가 없어 종업원들이 일을 못하고 있었고 숨죽은 듯 공장 안은 조용하기만 하였어요. 그러니 일하던 종업원들도 모두 집에서 놀고 있는데, 나 같은 새 종업원은 받을 필요가 없었어요. 들어서면 썰렁하기만 한 텅 빈 집안에, 직업도 없이 無(무)직업자로 있자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게다가 식량이 전혀 없어 산과 들을 헤매며 풀을 뜯거나 주울 때면 마음은 더 울적하기만 하였구요. 옆에서 함께 풀을 뜯는 자유스러운 그 짐승 무리들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였어요. 나중엔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단 말인가?』하는 반발심에 이를 악물곤 하였어요. 살자니 자연히 장마당에 눈길이 돌려지더군요. 가정들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빈 그릇만 달그락거려도, 장마당에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먹을 것이 항상 팔리고 있었어요.

보나마나 권세를 부리는 黨(당) 일꾼들이나 사법·안전 일꾼들, 군인 가족들에게서 흘러나온 낟알들이었지요. 나라가 난리통에 허우적거리는 틈을 타서 관료 족속들과 군대계통 가족들은 폭리를 얻는 거예요.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옷을 괜찮게 차려 입고, 기름진 중국 음식들과 옷가지들을 파는 중국 장사꾼들 모습이었어요.

북한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기르지 못하는 콧수염을 기르고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음식과 물건을 파는 남자들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였어요. 게다가 허벅다리와 엉치까지 착 달라붙은 바지를 입은 여자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나로서는 창피하기도 하였구요. 그들을 보며 나는 「저 사람들은 먹을 근심, 입을 근심이 없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날마다 부러워 바라보았지요.

-장마당서 만난 중국 남자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근처에 장사하러 나왔던 서른댓 살 되었을 중국 남자가 나를 보고 아는 체했어요.

『어이, 처녀 이리 오오』

망설이던 내가 다가가니 그 남자는 히죽 웃으며

『앞집 처녀 혼자 산다는 소릴 들었소, 얼마나 배고프겠소』

하며 팔던 중국빵 두 개를 나의 손에 쥐어주었어요.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빵이 나의 손에 쥐어지자 나는 꿈이 아닌가 싶었어요.

내가 빵 먹는 모습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남자는 나를 보고 몇 살인가 묻기에 열여덟 살이라 대답했어요.

『열여덟 살이라?! 곱게 생긴 처녀가 불쌍하구만』

그 남자는 잇달아 팔던 사탕 한 줌을 또 쥐어주며 자기가 팔던 물건을 거두어 가자니 힘이 든다며 보따리 하나를 먼저 가지고 우리 집에 좀 가져다 놓으라 하였어요. 나는 고마운 그 남자의 부탁대로 얼른 물건 보따리를 받아 이고 총망히 집으로 돌아왔어요. 한 시간 가량 지나자 그 남자도 우리 집에 들어섰어요. 그 남자는 신발을 신은 채로 부엌에서 보따리를 헤치더니 나에게 맞을 만한 옷 한 벌을 꺼내 입으라고 주는 것이었어요. 내가 질겁을 하며 사양하자 그 남자는 이런 것쯤은 중국에 흔하다고 하며 부모도 없이 어린 나이에 혼자서 살면 옷 한 벌 해입기가 하늘에 별따기일 거라고 내 몸에 옷을 들고 맞추어 보는 것이었어요.

나는 어렸지만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가 들어와 있는 것이 황당하였고, 그렇지만 고마운 그 남자를 뿌리칠 용기는 더욱 없었어요. 이어 중국빵 열댓 개와 사탕, 과자를 한 움큼 꺼내놓은 남자는 나를 보고 어서 옷을 입어보라 하였어요. 하도 권고해 내가 달아오른 얼굴로 윗방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 남자는 나의 아래 위를 쓸어보며 옷이 잘 맞는다고 하였어요.

내가 입은 옷을 쓸어보는 그 남자의 손길이 나의 몸을 누빌 때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異性(이성)의 야릇한 감각을 느껴보았어요. 그 남자는 좀 쉬었다가 가겠다며 서슴없이 신발을 벗고 방안 구들에 올라와 앉더니 들고온 가방에서 마른 명태와 술 한 병, 달걀 삶은 것 열댓 개를 꺼내놓았어요.

-1년 만에 먹어본 빵과 삶은 달걀

주춤거리며 부엌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재촉해 올라오라고 한 그 남자는 신문지에 음식을 모두 펴 놓았어요. 거듭 먹으라며 술병을 통째로 들고 꿀꺽꿀꺽 마시는 그 남자를 보니 나는 식욕이 당겨 어쩔 수 없어 마주 앉았어요.

빵과 삶은 달걀을 1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정말 맛이 있었어요. 나는 거의 일주일간 삶은 풀에다 옥수수가루 한 숟가락씩을 뿌려 끼니를 때웠거든요. 그 남자는 큰 술잔 하나를 달라더니 거기에 술을 가득 부었어요. 그리고는 슬플 때 술 한 잔만 먹으면 마음이 쑥 가라 앉는다며 안 먹겠다고 사양하는 나의 손에 억지로 술잔을 들려주었어요. 자기도 꿀꺽 마시며 내게 먹으라고 강압하는 그 앞에서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더군요. 술잔을 들고 마시는 나의 목은 타는 듯하였고 배 안에서는 역겨운 느낌이 가득 느껴졌었어요.

전에 우리 아빠가 마시던 북한 술과는 달리 중국 술은 훨씬 더 독한 것 같았어요. 나도 어릴 때 아빠 마시는 술을 조금씩 맛있는가 장난삼아 훔쳐 맛보았거든요. 내가 술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술잔을 받쳐주며 나의 입에 넣어주던 그 남자는 내가 다 마시자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결단성이 있어야 하오』

그는 나에게 달걀 삶은 것을 소금에 찍어 연속 쥐어주며 입 안이 써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나를 달랬어요. 창 밖은 이미 날이 어두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온 몸은 땅 속에 가라앉는 것 같아 자리에 눕고만 싶었지만 영문 모를 중국 남자가 앉아있으니 억지로 정신은 가다듬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내 정신은 정상이 아니었고, 그 남자의 손이 나의 손을 꼭 잡아쥐는 것을 느끼면서도 천길 나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만 꽉 차 있었어요.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나를 안아 이불을 깐 자리에 눕힌 그 남자가 수염이 가득한 얼굴을 비벼대는 것도 느꼈지만 그때엔 무슨 정신이었는지 가만 있었던 것 같아요. 조금 있더니 下身(하신)이 째지는 듯한 아픔에 윙윙거리는 머리를 들고 눈을 뜬 나는 놀라웠어요. 글쎄 내 몸이 알몸뚱이였고 내 몸 위에 엎드린 그 남자도 알몸뚱이였는데 아래를 움직일 수 없었어요. 나는 하반신의 아픔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감고 그 남자의 짓이 끝날 때까지 견디어야 했어요.

그 남자가 내 몸 위에서 떨어지자 나는 급히 이불을 덮으며 돌아누워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나도 서러웠어요. 그 순간에 아빠, 오빠 없는 설움도 마구 겹쳐 흐느꼈어요. 옆에서 달래는 그 남자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더군요. 한참 후 그 남자가 돌아간 뒤 이불에서 일어나 보니 새하얀 이불 깔개는 핏자국이 점점이 찍혀 엉망 진창이더군요. 나는 이날 저녁, 울고 또 울었어요. 하지만 나의 동창생들에게 들은 말이 생각이 나 좀 위안이 되었어요. 뭐 새 것이라며 값을 높이 부르면 한동안 잘 먹을 수 있다고, 지금 세월엔 주저할 것 없다고 하던 그들의 말이 생각났어요.

그 다음날 그 남자는 저녁이 어스름해지자 또 찾아왔어요. 물론 가방에 먹을 것을 가득 가지구요. 그 남자에게 도로 가라고 냉정하게 실컷 욕해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 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이해에 낟알 구경도 못 해볼 것이며 또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물건이나 돈을 조금 얻어 가져야 한다는 이기심이 쳐들었어요. 이 글을 읽어보시는 여러분들이 웃을 수도 있지만 내 목숨이 당장 굶어 경각에 이르렀는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걸 체험해 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거예요. 이날 저녁 그 남자는 나에게 돈 2백원과 팔 수 있는 빵, 사과, 과자를 또 한 가득 안겨주었어요. 그 남자가 떠날 때까지 동반해주기로 하구요. 정말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에겐 황송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