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는… (제56편)
정 다니엘 목사
(오직예수제일교회 당회장)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 (약 4:4)
56) 하나님과 벗이 되는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세상과 구별함에 있습니다. 세상과 짝이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은 곧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의 친구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세상과 짝하고 있음을 참으로 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특성이 그 절대적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를 경히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심히 패역한 행동을 두렴없이 행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란 교회 밖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경적 견해로는 예수를 죽이는 세계, 예수를 거부하는 세계, 예수를 능멸하는 세계, 예수를 박해하는 세계, 예수를 추방하는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북의 김정일 체제와 손잡는 행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이북의 김정일 체제는 예수를 죽이는 체제요, 거부하는 체제요, 능멸하는 체제요, 박해하는 체제요, 추방하는 체제입니다. 그런 체제를 가지고 있는 김정일과 손잡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그들과 친구되려고 하는 행동이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그렇게 행하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탄과 같은 동급의 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제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짝이 되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적이 되려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우려를 품고 친북 친김정일 노선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정치 세력들이 앞장서서 친북, 곧 친 김정일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화, 경제, 사회 제반의 인도적 견지에서 일반적 교류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그들 속에 신앙의 자유 확보와 선교의 목적이 아닌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을 민족주의 이름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사상에 흡수되어가는 그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과연 저들과 관계를 갖는 것이 저들을 예수께 흡수하고자함입니까? 아니면 저들의 사상에 흡수되고자 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을 국민 앞에 분명히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같은 민족으로 함께 해야 한다고 하는 감상적인 접근을 유도하는 선전, 선동에 전력함이 어찜입니까? 그 술책에 동요하는 신자들이 있음과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혼미케하는 영들이 어린 신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민족국수주의 이름으로만 고집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려는 저들의 의도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도를 저들이 하나님과 그 빛 앞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밝히지 않는 그 이유는 그 의도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저들의 의도가 교회 탄압과 무수한 성도들을 죽게 만든 그 사상을 이 땅에 받아 들여 주입하고 강요하는 데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근자에도 현재에도 교회 탄압을 통해 그 체제가 유지되는 곳입니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남조선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오늘까지도 그 적화 야욕을 굽히지 아니하였고, 또한 자기 백성들 일천만 명 이상을 절망의 기아선상으로 밀어 넣으면서 많은 공작금을 남한의 고정 간첩과 공작원들에게 쏟아 넣어 자기 세력을 광범위하게 구축해 온 것은 그 주지의 사실입니다.
남한에 동조자들을 규합하고 여러 갈래 통일 시나리오를 구축하여 한반도 이해 당사국들의 국제 역학의 흐름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하면서 그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있는 작금의 친북 세력의 행태가 이제는 크게 탄력을 받아 우리 국가,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무력화하려는 행동과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정치 각 주체들에게 친북 곧 친 김정일의 노선은 그들을 선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흡수되고자 하는가를 묻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함이 하나님의 적이요 우리 크리스찬 곧 그들의 손으로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과 박해자들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우리 주장입니다. 바로 그것을 깊이 주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도모와 행동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을 내세웁니다. 그러면서 같은 민족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을 퍼붓는 것은 어찜입니까? 자기 치하의 백성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 수많은 아사자들을 배출하는 행동은 어찜입니까? 같은 민족끼리 행할 수 없는 만행을 부자간에 걸쳐 퍼붓고 있는 그 사탄의 족속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려는 신자들의 행태는 또 무엇입니까? 남한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공작금을 쏟아부어가면서 노력을 기울인 그들이 과연 자기들이 구축한 세력으로 남한을 접수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죽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까? 그것은 김정일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체제가 예수를 죽이므로 유지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합니다. 우리 국가의 각 정치 주체들은 저들이 절대 무서워 하는 예수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남북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국력이 왕성하고 마침내 세계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저버리고 저들과 짝이 된다면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치 각 주체들은 반택찬택의 선거 구조로 판을 짜고 모든 시선을 모아 자신들의 도모를 숨기려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더욱 이 일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아니하며 오히려 백성들의 눈을 흐리게 하며 말로 호리고 있다면 그 받을 심판은 더 지대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분명한 친김정일 정책 노선을 절대 밝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이 밝히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를 사랑하는 우리는 성령으로 결집하여 이 나라와 백성과 그리고 우리 중에 오신 예수를 적들에게 팔아 먹는 세력들을 분명히 색출하여 경계하며 저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지혜로 싸워 이기는 여호수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는 우리는 성령 충만으로 크게 무장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게 주신 신앙의 자유와 우리 중에 오신 예수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일인까지라도 말씀을 전하며 순교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 국가와 백성을 지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적들의 손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어나 적들을 소탕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들의 손에서 건지시는 성경적 사례가 성경에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랑가운데서 우리가 합심하여 힘써 기도하면 그 날이 분명히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북의 교회들이 그들에게 그 수많은 날 동안 처참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 모든 일에 크게 개입하실 명분을 가지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일어나셔서 일하실 준비를 완료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크게 일어나셔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자유와 예수를 지켜주시고, 이북의 성도들의 신앙의 자유와 예수교회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북의 동포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만끽하는 그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상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 6:14-16).
그러므로 우리는 모여서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더욱 충만케 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한 벗이 되는 우리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북한의 기독교 탄압의 과거,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과거>
빛을 남긴 분들
강광범
공산당에 대항하다 6.25와 더불어 반동분자로 몰려 순교
(1910-1950, 순교자, 장로교 목사, 평남 강서 출생)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1910년 7월 18일 강광범은 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패전하였고 이로써 민족에게는 해방의 날을 맞았다. 그러나 그 당시는 공산당들의 횡포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잔혹한 일제 뺨치는 갖가지의 핍박이 극심한 때에 목회를 하였다. 목사가 된 강광범은 평안 대동군 남곶면 군청 소재지가 있는 평양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동강 하류에 대이도리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공산당의 주일선거며, 기독교도 연맹의 사이비 어용단체의 속화 만행을 볼 수 밖에 없었고 또 수난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기어이 이들은 반동분자로 내몰리게 되지만 지식인 숙청 등의 비행에 대하여 규탄하며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면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교육해 나갔다.
그러나 저들에게 요시찰인으로 낙인 찍혀 늘 알게 모르게 감시를 받으며 박해에 시달려야했다. 그러던중 평남 중화군 중화면 성현리 성현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를 당한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23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들은 소위 반동분자 지식인 숙청이라는 명목아래 강목사를 체포했다. 강목사는 중화군 중화 경찰서에서 공산당들에게 모진 매와 갖은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 경찰 유치장에서 최후를 순교로 그의 아름다운 생애를 마쳤다.
김경종
6.25사변중 교회와 양무리를 지키다 순교.
(1894-1950. 장로교 목사. 혜산. 진. 북청,함흥에서 목회. 6.25공산군에게 납치 순교. 함남 흥원 출생)
김경종은 구한말 갑신정변이 일어난 1894년 함경남도 흥원근 홍원읍에서 출생했다. 그가 목회에 꿈을 갖고 그의 나이 서른이 지난 1929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하게 되고, 첫 목회지는 함남 혜산군 혜산읍 혜산리 장로교회로 1932년가지 봉직했다. 그후 1933년 다시 함남 함흥에 운홍리 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1940년에 함남노회장에 피선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던중 일재하에서 혹심한 고문과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나라와 민족은 해방이 되었다. 이 날을 소망했지만 조국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3.8선은 그어지고 민족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더 무서운 6.25의 비극을 불러온 것은 무엇때문이었던가 .
북한에는 무신론 공산주의가 교회와 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은 일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경종 목사는 여기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눈물로 월남의 뜻을 굳혔으니 이때가 6.25 발발 2년전인 1948년 자유의 땅 이남으로 월남하게 되었다.
월남한 후로 서울 후암교회를 맡아 2년간을 시무하다가 드디어 1950년 6.25를 서울에서 맞았다. 수도 서울은 어이없게도 함락되고 또 한바탕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가족은 다 피난을 시켰으나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공산군들에게 납치되고 말았다. 그의 선천적 성자 타입에 온유하고 겸손하며 인자한 예수님같은 인품, 게다가 지혜 또한 출중하여 온 교인들의 존경을 아낌없이 받던 김목사는 교회와 양무리를 지키고 돌보다가 마침내 순교의 영관을 쓰게 되었다.
김영학
독립운동으로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권서인, 감리교 목사, 시베리아선교 순교자)
김영학 목사는 (1877년-1932) 황해도 금천군 금천읍 조포리 양반가문을 배경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향리 한문사숙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여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양반 가문에서 양반수업을 받았지만 그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바깥 물정에 눈을 뜨게되자 체면도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숨어서 나쁜 친구들과 배운 술담배로부터 정도 이상의 주색잡기로, 난봉꾼으로 그 고을에서는 이름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방탕한 생활을 억제시킬 만한 힘이나 방법이 없었다.
그가 30살이 되던 어느날 토산장이 서는 날이었다. 영학은 아직 낮인데 그는 술에 만취되어 거리를 휩쓰는 중에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형님! 예수 믿으시오.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술김에도 잔뜩 자존심이 상하였다. 이쯤 되고 보면 알아서 피해갈 일인데, 시장터에는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 있는 대로 물을 퍼서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웃으면서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린 애기를 다루듯 하는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전도지를 마구 빼앗아 찢고, 발길로 걷어찼다. 하지만 여전히 대꾸없는 이 친구에게 이런 짓은 망나니 같은 자신에게조차 흥미거리도 못 되었고, 더 이상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언제쯤이나 되었을까? 그 이튿날에야 정신을 차리고 어제의 일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차츰 후회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고 그는 쪽지에 적힌 글을 읽고 그곳으로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에 벌떡 일어나 단숨에 달려가 본즉 그곳은 전도집회 장소였다. 이 청년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또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점점 그 분위기에 빨려들었고 목사님의 설교는 그의 젊은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고 또 그 감동으로 달아 올랐다. 그는 한없이 울었다.
그 집회에 끝까지 참예하였고 이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어떤 이에게서 성경을 권해 받았다. “이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거니와 한 사람을 목사로, 애국자로 목숨을 바치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었다. 그 길로 그는 한해를 수일을 보내듯 이 신앙에 깊이 들어가 온갖 열심을 쏟아 바쳤다. 그리고 믿게 된 다음해에 권서인이 되어서 성서공회에서 공급하는 성경, 찬송가, 쪽복음을 등에 지고 전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1911년 해에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분을 맡아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서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까지 그 동안에 평산, 금천, 장연, 철원, 서울종교, 수표교, 양양교회를 담임 목회하였다.
그러다가 김목사는 일재의 탄압과 혹독한 고난으로 인해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고 1921년 감리교연회는 양주삼 목사를 중심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시베리아는 당시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난 지 6년 밖에 안된 때였다. 과격파들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괴롭혔다.
김목사는 혹심한 옥고를 치뤘던 뒤라서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자원하여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지로 왔고, 나라 없이 외롭게 사는 교포들을 위로하여 교포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교회는 곤경중에서도 견고히 발전하였다. 9년간을 목회에 전념했다. 그런데 1930년 공산당들은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김목사를 구금하였고 근 1년간을 공갈, 협박 또는 회유책을 써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단연코 거절하자 1931년 3월에 가장 악질적인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중노동형을 받고 임지에서 약 100리 떨어진 곳에서 복역을 하였다. 이곳은 보통 영하 40-5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지대였다. 어느날 눈과 얼음이 쌓인 곳에서 중노등중에 갈라진 얼음 사이에 수십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으로 김영학 목사 그도 여기 함께 희생당하니 공산당의 배교의 강요를 배격하고 신절을 지켜 영광스러운 순교 대열에 참가하였다.
김응락
6.25사변중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됨
(1906-1950 장로교 장로, 신의주 제일교회 영락교회 장로로 봉직, 평북의주 출생)
서울의 한복판 중구 저동2가 69번지에 세계적 굴지의 영락교회 뜰에 한 비석이 서 있는데 거기 이런 글귀가 적혀 있는것을 읽을 수 있다.
“무거운 발길을 옮겨 골고다로 향하신 피어린 주님 발자국 따라 생을 다하고 의의 길 택하시오며 모진 붉은 돌에 쓰러지시올 때 스데반의 미소 또한 그 광채 만면에 사무치고 마지막 한 방울 피 흘리시도록 영락의 제단 부둥케 안으사 숨을 거두셨으니 베다니 뜰에 첫번 맺은 순교의 원공은 장하시다.”
이것이 김응락 장로가 개척하고 세우고 섬기던 영락의 뜰 쓰러진 자리에 이를 기려 세운 순교비문이다.
김응락은 평북 의주군 고관면에 그 고을에서 알아주는 부호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김응락은 윤택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면서도 온유한 성품이 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양시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주일학교에 열심히 출석하다가 그의 나이 15살이 되던 해에 세례를 받고 그의 성실한 성품이 교회의 인정을 받아 19살에 소년집사가 되었다.
처음 섬기던 용천 덕흥교회에서 신의주로 이사하여 신의주제일교회에서 12년간을 집사로 헌신봉직하였다. 일찌기 상업에 손을 대어 포목상을 경영하였는데 사업을 도우시는 주의 축복은 놀라우리만큼 날로 번창일로 있어서 성실한 그의 인품과 잘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가고 있었다. 그는 돈을 버는 재미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쓴다는 것에 더욱 가슴 후련하고 마냥 즐거웠다.
1930년 몇몇 뜻있는 분들과 함께 평북 신의주 미륵동에 보통학교 3년 과정의 장로교계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서울에 올라가 여관업을 포목상과 겸하여 하였는데도 여전히 사업적 성공은 순조로웠다. 교회 봉사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솔선봉직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해방된 후에 공산당의 기독교 탄압은 혹심하였다. 견디다 못한 동포들은 대거 월남을 했는데 신의주의 교인들도 그랬다. 교인들이 상경하자마자 김응락 장로를 찾았던 것은 같은 교회의 집사로서 그가 어떤 분이가를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는 월남하여 안동교회를 섬겼는데 1944년에 벌써 장로가 되어 있었다.
김 장로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다가 보니 월남교인 중심으로 한 교회를 설립하자는 간청이 날로 더해갔다. 처음으로 교회설립위원으로 추대되어 베다니전도교회라는 작은 간판을 걸고 1945년 12월에 한경직 목사를 모시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 이래 북으로부터 피난해 온 교인들은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1950년에 이르러 기도와 정성으로 피와 땀의 결정체인 350평의 석조건물로 역사에 남길 만한 예배당을 완공하고, 이해 6월 5일 온 성도의 감사와 감격으로 감사예배를 드리고 난 김장로는 지금껏 살아온 일생을 통해 이 날보다 더 기쁜 날은 그 어느 때도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20일 후에 그날도 주일이었다. 6.25가 이 날 터졌다. 김장로는 집이나 전토나 식구는 버릴지라도 갓지은 이 돌 예배당은 주님을 위해, 성도를 위해 목숨바쳐 사수할 것을 이 날 심중깊이 다짐하였다.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 이룩한 교회였던가! 오매불망 교회뿐인 생각에 한강을 건널 수도, 지하로 몸을 숨길 수도 없었다. 그러나 뉘라서 막을 장사가 있겠는가? 공산군은 이 예배당을 강점하고, 무기창고와 연락사무소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그토록 간곡한 만류에도 교회 형편을 살피고 돌아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몇 달이 흘렀고 공산당이 북으로부터 오고 유엔의 지원군은 남으로부터 오고 있던 9월 하순으로 접어들던 21일 아침이었다. 이 날도 교회를 한번 돌아보고 싶었다. 교회가 그 전란 속에서 폭격과 포격에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고 상처없이 서 있는 것만도 고마웠다. 교회 뜰에 들어 가서 막 엎드려 기도하고픈 충동을 누릴 길 없이 정문을 미는 순간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거 누구요, 어딜 가는거야”하고 누군가 소리쳤다. “난 이 교회의 장로요 기도하러 들어가려는 길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은 현장에서 김 장로를 체포하여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중서부에 감금하고 말았다. 교회 주변에 법석대던 인민군은 이상하리 만큼 정적이 흘렀다.
김장로는 며칠동안 10년이나 형을 산 사람처럼이나 모진 고문과 학대로 지친 몸에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교회까지 끌려왔다. 서울을 내주고 다시 도망쳐야 할 저희가 김 장로를 어떻게 대우할 것 같은가? 김장로는 임박한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죄어들고 있음을 직감한 나머지, 담담히 교회 계단을 오르면서.“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늘 아쉰 마음 뿐일세” 살아서 부르는 마지막 찬송이요, 죽음을 각오한 그는 거칠 것 없이 크게 찬송을 불렀다. 이때 계단 옆 2층에서 백여서(전성천목사 사모)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뛰쳐나오며 덮석 손을 잡는데 인민군도 한눈 팔고 멍하니 보고 서 있는 틈에 함께 잡혀오던 김만이란 청년에게 눈짓을 할 때 무슨 뜻인가를 감지한 청년은 그 길로 도망치고 김장로는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순교비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다발총탄을 받고 영광의 순교를 통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김종한
6.25사변중 만경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순교함
(1904-1950 장로교 목사. 서울, 황해, 김제 등지에서 목회. 서울에서 출생).
김종한 목사는 서울 청량리에서 1904년 10월 28일에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늘 농촌 계몽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느날 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게 되었다.
귀국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청량리교회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직영신학교인 지금의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의 과정을 이수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청량리교회에서 황해도 석탄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했다. 여기서 그는 다시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인 전북 김제 노회 소속의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석탄교회 재직시 일제의 신사참배를 극력 거부하고 4년간 봉직했으나 사임했다. 그가 순순히 농촌교회를 택한 것은 농촌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는데, 이 꿈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시 목회를 마다하고 자원하여 가실리의 시골 농촌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8.15 해방을 맞고 만경교회를 옮기기까지 교회를 섬기며 농촌 계몽에 힘썼다. 그리고 마지막 부임지인 만경교회로 이임하게 된것도 같은 뜻에서였다.
1948년 만경교회에 부임하여 1950년 6.25 비극을 맞았다. 공산군이 들이닥치기전 김목사는 찬송과 기도로 예배를 드리며 환난날에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자세를 설교했다. 그후 공산군은 만경에 진주하게 되었고 공산군들이 이웃교회를 강점하고 민주선전실로 주민들을 모아놓고 전시사상교육과 노래, 춤을 가르치며 이를 반대하는 장로와 집사들을 구금시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만경교회만은 한동안 공산군의 간섭없이 계속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의 마수는 만경교회에 미치기 시작했다. 먼저 교회를 주민 연설장소로 써야 되겠다고 치안대에서 통고해왔다. 그리고 무죄한 청년들을 소위 의용군을 마구 잡아갔다.
한편 이때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공산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갔다. 그래서 당시 신학1년생이었던 최정열 전도사가 반공혁명단을 조직하고 단원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밀이 사전에 새어나가 단원들이 체포되었다. 단원을 조사한 결과 거의가 만경교회 청년들이라 공산군은 만경교회 장로와 김목사를 소환하여 배후조정자로 단정했다. 그러나 김목사는 심문을 받은 결과 무과한 것으로 판명이나 귀가했다.
그러나 9월 25일 공산군은 김목사와 장로를 다시 소환하여 심문했다. 그리고 9월 28일 아침이 밝아왔다. 분주소와 인민위원회 민청사무실은 텅비었고 끌려갔던 의용군들도 돌아왔고 국군도 왔고 숨은 사람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김목사는 수색대원에 의해 14구의 시체와 함께 우물에서 건져졌다. 김목사는 공산군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기도하며 저항하다 순교한 것이다.
노병인(盧炳仁)
(1907 - 1950, 장로교 집사. 순교자. )
노병인목사는 전남 나주군 공산면에서 출생하였다. 형님인 노병재집사를 따라 영광군 연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함평출신인 이선임과 결혼하였으며, 이들 부부는 염산교회를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선임은 믿음이 돈독하여 염산교회의 집사의 직분을 맡았으며, 이 가정도 형님 노병재 집의 가족과 같이 장엄한 순교를 하였다.
장남인 노용길은 당시 광주 숭일중학교에 다녔다. 9.28수복에 기삼도, 사촌형인 노순기 등과 같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공산군에 불잡혀 장엄한 순교를 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부모가 죽임을 당하였고 당시 목포성경학교를 다니던 노원례. 노용남. 노정자. 노신자 등 일가족 7명이 염산교회 밑에 있는 수문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참살당하였다.
노병재(盧炳在)
(1904 - 1950, 장로교 집사. 순교자. )
노병재집사는 전남 나주군 공산면에서 출생하였다. 해방전에 나주에서 영광군 염산면으로 이주하였으며, 8.15해방을 맞이하면서 염산교회를 출석하였다.
조승계목사가 인도하던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철저하게 기도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집사로 임명을 받고 부인 장일영집사와 같이 교회 봉사에 전념하였다. 6.25사변때 공산군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아니하고 지켜 오다가 9.28 수복때 국군이 유엔군과 같이 영광읍을 거쳐서 법성포를 지나간 일이 있었다. 이때 노병재 집사의 둘째 아들 노순기와 사촌간이 노병인 집사의 아들 노용길, 목포성경학교 학생인 기삼도 등이 태극기를 만들어 국군을 환영하고 돌아와서 염산면 봉남리 도설마을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 만세사건으로 기삼도 등 일행이 1950년 10월 7일 교회 밑의 수문에서 순교를 당하였으며 친동생인 노병인 집사가족, 사촌간인 노병규 집사 가족도 함께 순교당하였다.
이때 어머니는 65세의 나이였으며 노오차, 노육차 등 8식구가 차례로 순교하였다. 특히 노병재 집사 부부는 공산군에 의해 묶이어 교회 바로 밑에 있는 수문에 던짐을 당했는데 이때 이들 두 부부는 새끼줄을 끊고 바다속에서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찬송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당시 목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아들 노형기만 살아 남았고 노형기의 사위인 정기복은 현재 서울 약수교회 전도사로 사무하고 있다.
노영수(蘆永守)
(1897-1950, 구세군 사관. 순교자. )
경북 의성군 봉양면 노매동 338에서 부친 노철준과 모친 오해월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가난한 농가였으나 유교적인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1908년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이 1909년 3월 9일 노매동에도 군영(교회)을 세웠는데, 소년시절부터 또래되는 아이들의 지도자격이었던 그는 7인동지를 구성하여 1915년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다.
31년간의 목회생활 중 경북에서 어천등 여러곳을 담임했다. 건장한 체격, 굳건한 의지, 강한 신앙, 쾌활한 생활로 가족과 이웃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한약으로 의료봉사도 했다. 1949년 8월 17일에 그는 진주군영 담임으로 파송되어 큰 부흥을 일으켰으며 인근 마을에 기도처를 개척하였다.
1950년 6.25사변때 공산군은 경남 하동을 거쳐 진주로 육박, 30리 밖에서 격정 중인데도 [최종말이 오면은]이란 제목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였다. 월요일에 진주시가 함락되어 다른 교역자들은 부산으로 갔으나 끝까지 군영을 지키려고 5리 밖에 은신하였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취조받다가 9월 5일 새벽 3시경 16km밖의 지리산 기슭에서 총살되어 장엄하게 최후를 마쳤다.
취조 중, 보안서에서 부인과 딸을 시켜 그가 그들에게 협조토록 권했으나 “나는 30년간 구세군에서 예수의 십자가밖에 전한 것이 없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대들에게 동조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를 앞세우고 진주영을 뒤질 때 구세군 모자를 강대상 속에 넣고 따라오는 부인과 딸 미리와 막내 아들 태식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라. 믿음을 지켜라.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고 유언을 남겼다. 죽기 전에 같이 죽는 학생들을 살려달라고 요구하고,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군기를 들고 “할렐루야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시오”라고 크게 외쳤다.
그는 세계 구세군 100년사의 처음 순교자였다. 장형일부령이 그의 후임으로 가서 회관증축 및 묘비건립 일주기추도회를 거교회적으로 가졌다. 이 사실은 만국본영(런던)에서 발행하는 <구세공보>(The War Cry), <사관잡지>, <벵가드>(The Vangard), <영학생교재>, <소년주일공과>, <전세계>(全世界)등의 간행물과 <<구세군 100년사>>, <<극동의 구세군>>등 책자로 널리 알려졌다. <<순교자의 피>>(1967)라는 영화를 만국본영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최후 광경을 목격한 두 청년(김복권. 최광수)은 지금 사관(士官)이 되었고, 고인의 2남 5녀중 막내아들(태식)과 장손(정일)이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막내사위인 이기춘은 감리교신학교수가 되었다.
노형래(盧亨來)
(성결교 집사. 순교자.)
노형래집사는 충남 서천군 마서면에서 출생하였다. 삽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기독교인이 되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일제말기 기독교 탄압으로 고통을 겪었다. 해방 후 향리에 한성성결교회를 설립하여 시무하는 한편 교역자가 없는 이웃 길산교회와 비인교회를 왕래하면서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재건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난 후 피난권고를 물리치고 교회를 지키다가 부친 노승우, 아우 학래와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굳건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마침내 1950년 8월 중순경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한편 공산군들은 후퇴시 감옥에 불을 질러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그러나 부친과 아우는 구출되었고 부친 노승우는 아들이 설립한 한성교회에서 장로로 오랫동안 시무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기화권사를 비롯하여 2남1녀를 두었다.
노홍균(盧洪均)
(1925-1973, 장로교 전도사. 순교자. )
노홍균장로는 전남 영암군에서 출생하였다. 예수를 믿고 전남노회 목포 지방에서 경영하는 목포 달성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 영암지방에서 전도사로 목회하였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그가 시무하고 있던 영암군 장천면 장천교회에도 공산군이 밀어닥쳤다. 7월 23일 오전 예배만 드리고 이날 오후부터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전도사 사택에서 몇몇 가정이 모여서 기도회를 가졌다.
공산군의 만행을 목격한 교인들은 전도사에게 피난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끝내 거절하고 교회를 지키다가 후퇴하는 공산군의 손에 끌려갔으나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유족으로 부인과 2남 1녀가 있으며 순교자를 냈던 장천리교회는 서호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박경구
공산당에 저항하다 순교
(1903-1950. 장로교 목사, 교육가)
박경구 목사는 1903년 황해도 황주군 청룡면 포남리에서 당포교회 박태화 장로와 송태신 권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 박태화 장로는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5회로 졸업하고 재령읍교회를 시무했으며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되어 많은 선교의 공을 세운 형인 선교사 박태로 목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박경구는 독실한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지라 신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평양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수석으로 1926년 졸업했다.
진남포에 있는 득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정열을 쏟았던 교육계를 사임하고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재학중 신사참배문제로 갖은 고초를 다겪으며 1941년 제36회로 졸업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평남 대동군 이목리 이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으며 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황해도 장연군의 서부교회로 부터 청빙을 받아 곧 목사로 시무했다.
그해 어느날 그는 일제로부터 신사참배결사반대의 의지를 천명하고 그후 1945년 4월 6일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괴롭기만 한 세월도 가기마련, 드디어 8.15 해방을 맞았다. 한편 그는 곧 출옥해서 다시 장연읍의 서부교회에 부임했다. 출옥과 더불어 함께 모시던 목사를 모시게 된 교인들은 너무나 기뻐했으며 교회는 날로 부흥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국토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설립된 공산당 정권은 박목사의 새로운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평양장로회 신학교에서도 사상적 대립과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서 노회에서는 박목사를 교수로 추천했다. 그는 김영윤 목사등과 천리길을 멀다않고 출강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경건회 시간에는 학생들과 한 몸이 되어 조국의 통일과 신앙의 자유와 옥중에 있는 종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기독교 연맹”이 결성되면서 공산당의 압력은 날로 심해서 나중에는 신학교육마저 공산주의화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그는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맞서서 저항했다. 그러나 이 단체에 가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목사는 그들의 회유와 강요를 끝내 거절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당은 박목사를 연맹의 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다는 구실로 연행해서는 잔인하게 고문하다 마침내 죽이고 말았다. 박경구 목사는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과 고문을 끝내 이기고 순교의 신앙의 지조로 지켰다.
배춘근
목사가 되겠다던 꿈을 이루지 못한채 순교한 전도사
(? - 1950년 순교자 전도사, 황해도 장연군 출생)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를 세워 기독교 복음을 이 민족 가슴에 심어준 어머니 교회의 소재인 황해도 장연군에 흥해 배씨 가문의 원구씨의 9남매 중의 막내 아들로 배춘근은 태어났다. 9남매중 7남매가 원인모를 병으로 죽어나가는 터에 어느날 안씨 전도부인을 춘근의 할머니가 만났다. 안씨 전도부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당에 나가면 삼재(三災)를 면하고 큰 축복까지 받을 수 있다는 열렬한 전도에 그 날에 배씨 가문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끝으로 춘근이를 붙들었다. 춘근은 천성이 어질고 착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자 같았다.
부흥사경회를 비롯해 19살짜리 어린 총각집사는 연합사업에도 복음사업에도 빠진 데가 없이 열심을 냈다. 일제의 신사참배와 조선의 징용으로 징집되어 훈련받았다. 그러던중 드디어 1945년에 이르러 전쟁은 일본의 불리한 쪽으로 기울다가 마침내 진해에서 훈련을 받는 중에 해방을 맞고 9월에서야 나는 듯 귀향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과거 일제보다 더 열악한 지옥을 구축하고 있던 것은 공산당 패거리들이었다. 해방의 기쁨은 커녕 날로 심해지는 러시아인들의 약탈과 횡포, 여성 겁탈로 이에 힘입은 조선공산당의 위협적인 거센 물결은 차차 교회 쪽으로 기울어져만 갔다.
이러는 판국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는 중에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목사가 되어 주의 교회를 받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밤마다 교회 마루바닥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목사 공부를 하자면 신학을 해야 하는데 어느 신학을 할 것인가? 배 집사는 아무래도 지속적이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은 평양보다는 서울 쪽의 조선신학교에 입학해야겠다는 생각에 1946년에 남으로 떠나는 틈에 끼어 사고무친한 서울에 와서 입학이 가능한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한 나머지 그가 졸업하던 1950년까지 소식을 끊고 한 가지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음악적 소질이 있어 학창시절에는 “경신코러스”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춘근은 6.25가 발발하던 그 해 졸업을 하고 5월 30일에 임지인 부평, 소사의 중앙교회에 초빙되어 열심히 전도하고 심방하여 교인들과 하나가 되어 존경을 한몸에 받으면서 성공적인 목회를 펼쳐 나갔다. 음악적인 소질로 청년들과 함께 성가대를 은혜롭게 이끌어가는 등 처녀목회에 헌신을 다하고 있을 때에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는 발발되었다. 기습적인 저들의 남침으로 사태수습의 여유도 없이 서울을 사흘만에 내어 주어야 했던 이 참극은 이곳 부평에도 일주일만에 몰아닥쳤다. 젊은이들은 피난을 떠나고 미처 못떠난 부인들과 노인들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래서, 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산에 가서 교인들과 함께 피난 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1주일을 지나면서 하루 이틀에 끝날 전쟁도 아니고 해서 야밤중에 산에서 내려왔다. 이 장로댁에서 하루밤을 쉬고 이튿날 아침에 보았더니 교회가 이미 제단 벽에 김일성 사진과 붉은 기가 꽂히고 무신론자들의 사무소로 변해 있었다.
이때에 유치원 보모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갔다가 그들에게 붙잡혔다.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소름끼치는 비명에 고문받는 어린 양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뛰어들려는 전도사를 이 장로가 붙잡고 안된다는 것이다. 안된다는 것을 굳이 뿌리치고 그는 교회당을 향하여 나섰다. 이내 저희들에게 잡혔고 이 교회전도사라는 것도 모두 다 말했다. 이제는 더 살아날 소망은 없고 전도사는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러분은 남조선을 해방한다는 의의 기치를 들었다면 신성한 하나님의 교회를 징발하여 예배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절대 잘한 것이 아니요. 민족의 양심이요, 교육의 도장인데 이렇게 마구 구둣발로 짓밟는 것이 이해가 가지를 않소”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배 전도사가 월남민인 것을 알고 그간의 한 일을 심문하고서 미제국주의의 방조자요 인민의 적으로 몰아 온종일 심문을 계속하다가 어둠의 장막이 검은 날개를 내려덮는 듯한 밤이 오자 귓속말로 주고 받더니 배 전도사를 끌고 산으로 올라간 얼마후에 두 발의 총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었다. 이후 어둠은 계속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깊어만 갔다. 날이 밝아오자 이 장로와 교인들의 순교자를 안장하려고 올라갔을 때는 기도하는 자세로 굳어져 있는 시신을 입은 옷 그대로 눈물로 매장하였다.
송정근(宋貞根)
감리회 서부연회 마지막 순교자
송정근 목사는 1895년 1월 12일 황해도 서흥군 도면 도리에서 송경호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회덕이요, 호는 해심이라고 하였다.
1927년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은 송목사는 1943년까지 여러곳에서 시무하였다. 1935년에서부터는 예수교서회(현대한국기독교서회)이사로서 출판사업에도 관여하였고 강서읍 구역담임 시절에는 지방 감리사로, 연회실행위원으로 , 그리고 총회 총대로 활약했다. 그는 어느덧 한국교회 목사로 성장했던 것이다.
송목사는 친일행위에 동조하지 아니했더니 목사직 정지 처분을 내렸다가 1년만에 복직 통지가 내려왔다. 그것이 1943년 강서읍구역에서 시무할 때였다. 1944년 일제의 패전을 앞둔 시국은 점점 다급해 왔다. 거기에 따라 날뛰는 감리교회 친일 교권자들이 일제에 항거하고 있는 목사들을 목사직에서 파면시킬 때 송목사도 같이 파면을 당했다. 그는 8.15 해방이 올 때까지 농촌에서 호미들고 김을 매며 지냈던 것이다.
1945년 10월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자 평양지방에서는 그를 감리사로 선택하였고 동부연회 철원지방과 원산지방까지 포함된 서부연회에서는 그를 연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송목사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물론 교단 내부의 책임도 중한 것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해야 하는 외부의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송목사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 또는 전가함도 없이 다방면으로 대처해 나갔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는 공산정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 연합으로 장대현 교회에서 모이는데 전력을 다했고, 주일 설교에는 직접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했으며, 미소공동위원회를 북한에서 모일 것에 대비하여 조직된 기독교 민주당에는 창당위원으로 참예하여 부당수에 취임했다가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당했다.
마침내 1950년 6월 24일 공산 괴뢰들은 6.25 전쟁 도발을 하루 앞두고 교회 지도자들과 우익진영 인사들을 총 검거할 때 송목사도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10일 국군의 평양 입성으로 총퇴각해 가는 공산군에 의해 살해, 순교하였다. 그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갈때. [나는 이제 가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말을 부인과 자녀들에게 남기고 갔는데 정말 그 길이 마지막 길이었던 것이다.(윤춘병)
오병길
전도와 심방 전도사로 6.25 때 순교
(1897-1950 순교자.장로교 전도사.전북 고창군 출생)
동학군의 발상지인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에서 가까운 전북 고창군 공음면 덕암리에서 1897년 오윤팔의 네째 아들로 오병길은 태어났다.
1900년에 이곳 고창지방 교회는 전남 영광지방에 여러 교회가 세워질 때 영광교회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고창땅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졌다. 이때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이아락 목사는 이 고창 고개를 넘나들면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암담하고 혼란한 이 때에 우리가 빨리 개화해서 이민족의 활로를 찾아보자고 하여 이 마을의 오창언, 오병희 오윤팔, 오동근 등이 중심이 되어 이아락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이런 날이 몇날 안되어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오병길도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였다. 오병길은 머리가 총명하여 이아락 선교사가 광주숭일학교에 입학시켰다. 입학식장에서 “여러분! 베드로는 참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라고 이아락선교사가 설교를 하면서 마지막 마치는 때에 ”베드로는 얼마나 약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만 증거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오병길은 순교의 말에 귀가 번쩍 들렸다. ‘그래, 나도 베드로와 같이 핍박 속에서 목숨을 요구하면 기꺼이 베드로처럼 순교의 길을 가야지...’이렇게 감명깊은 성경학교의 입학은 시작되었다.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첫 부임한 교회의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마을에는 새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제사도, 술도, 도박도 사려져 갔다. 오전도사에게 감명을 받고 그의 신앙지도를 따르면서 성장해 왔던 최재섭 등 65명이 결연히 신앙의 순결을 지키다가 6.25동란에 65명의 순교자를 낸 야월리교회가 바로 이 교회였다.
그 무렵에 새로 부임한 교회가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였다. 부임하자 전도밖에 모르는 전도사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어려운 교인들에게 신세질까봐 항상 미싯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시장하면 우물가에 앉아 시원한 냉수에 타서 마시며 시장기를 면하곤 했다. 그야말로 전도와 심방이 그의 일생의 전부였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성령의 도움만 의지하고 전도에만 열중하였다.
이러는데 6.25사변은 터졌고 국군은 둑이 터져 들어닥치는 인민군들에게 내어 주고 계속 후퇴만 하는데 몇날이 못된 7월 하순께 부안군 백산들녘에도 물밀듯이 인민군들은 밀어닥쳤다. 이 고장에 들어서자마자 공산군은 교회부터 점령하고 오전도사를 쫓아냈다. 할 수 없이 본가에 돌아왔다.
예배드릴 처소를 뺏긴 교인들은 오전도사의 큰 아들의 집 오주환 집사의 부엌에 지하실을 파놓고 주일이면 온 가족이 모여 벽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예배드리기를 시작했다. 이것만이라도 너무 감격하여 “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지하실에서 찬송을 불러대기도 했다. 9월에 접어들자 공산군은 소위 반동분자와 기독교인 수색에 나서 손이 안닿는 곳 없이 마루바닥, 방바닥 등을 두들겨보고 쑤셔보는 중에 오집사 부엌 바닥도 이렇게 저희에게 발각이 되고, 자녀들이 보는 목전에서 여지없이 만신창이 나도록 짓이기니 3부자를 철사줄로 묶어 공음면 분주소로 끌어갔다. 3부자는 찬송을 불렀다. 공산군은 손에 잡히는 대로 쳐서 전신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점점이 땅에 흘리기는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9월9일이 왔다. 오전도사의 인민재판의 날이다. 공산주의의 사형집회 의식의 하나일뿐 재판이 아니었다. 면분주소 앞뜰에서 이승만 괴뢰정부 앞잡이, 또 미국과 내통하는 스파이, 선량한 인민의 피를 빠는 흡혈귀라는 죄명으로 선고받고, 옆구리에 가슴에 아랫배 등 수없이 창으로 찔려 그야말로 형언키 어려운 참상을 당하고 그 이튿날 두아들도 저들의 온갖 회유와 설득, 협박을 거부하다가 아버지가 당한 순교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저희에게 대창으로 순교를 당했다. 일가족 삼부자의 장한 순교다.
원성덕
공산군에 붙잡혀 순교
(1889-1950 순교자,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신성학교 1회 졸업생, 평북 구성군 관서면 출생)
그는 1889년 10월 7일에 평북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 원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원성덕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열심있는 학동으로 신성학교를 졸업하였다. 1898년 선교사 휘트모아가 선천읍에 선교 거주지를 정하고 정착하게 됨으로써 선천은 평북선교사의 조사였던 양전백 등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교육과 개화자강의 이념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그 뜻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장으로 [선천중앙회]를 발족(1905.7) 시키기에 이르렀으며, 구남교회당을 빌어서 개교식을 가지니 신입생 2명에 6명의 교사로 출발하여 1909년 6월에 비로소 제1회 졸업생으로 원성덕을 포함한 9명을 배출했다.
그는 평소에 꿈이었던 목사가 되기 위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후 목사로 안수받아 교회를 섬기는 중에도 나라 사랑의 일념은 식을 줄 몰랐다. 원목사는 서 구성 남시교회, 철산 연동교회와 원폐영교회 그리고 구성 신시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의주 영산교회를 섬기다가 1950년 6.25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해 12월 북한 공산군은 완전히 손을 들어야 할 즈음, 중국 공산군의 개입으로 사태 위기를 모면하려던 저희들은 거슬리는 인물들은 누구를 불문하고 직결 처단하는데 혈안이 된 때에, 인민군의 손에 잡혔으니 어찌 살아 남기를 바랄까? 목사로서 산다는 것이 당시에는 좀 이상할 그 때였다. 원목사를 잡아끌어 산에서 죽였는데, 사지를 옷을 찢듯이 찢어 죽이던 날 부인과 가족 모두 함께 총살형으로 처형되니 이로써 영광스런 순교 대열에 서게 되었다.
이성휘(李聖徽)
공산당에 저항, 신학교 사수를 위해 순교
(1889-1950 순교자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 평북 철산 출생)
이성휘 목사는 산 높고 물 깊으며 인심좋은 고장 평북 철산에서 이씨 가문의 귀한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숭실전문학교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졸업을 하자 곧 미국으로 건너가서 샌프란스코 신학교를 거쳐 명문 프린스턴신학교를 수료하고 여기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헨노이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성휘 목사는 평양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받고 서문밖교회에 부임하며 목회 성역에 몸바쳐 봉직하면서 뜨거운 민족적 신앙을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한편, 이번에는 그의 모교였던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수하다가 마침내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취임하기에 이른다.이리하여 교육자로서 교육에 많은 공을 끼친다.
이와같이 일제와 투쟁을 계속하면서 드디어 8.15 해방을 맞는다.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던 날 1945년 8월 15일 삼천만 민족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한아름씩 안고 사람들은 교회로 교회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교회는 급속도로 우후죽순처럼 힘있게 뻗어 나가면서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성장해나가는 교회에 필요한 수급책은 교역자 양성이었다.
그동안 평양에 있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38년 단말마적인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백절불굴의 신절을 지키겠다는 결의로 마침내 자진 폐교로 문을 닫은지 7, 8년이었다. 이제는 일어나 먼저 서둘러 신학교의 문을 다시 열어야만했다. 해방되던 그 해 11월 14일부터 평북 선천에서 모였던 목사 수양회에서 조국의 해방을 감사하는 심령부흥회가 막을 내리자 북한 땅의 전 교회가 뭉쳐서 이북 5도 연합노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현직에 임하였으나 올 것이 와도 너무 일찌기 왔다.
공산당 정권은 신학교를 저희 수중에 넣기 위하여 소위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을 성화같이 독촉하였다. 그러나 교장은 “신학교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등록되어 있으니 지상 나라에 등록할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있을 공산당들도 아니었다. 공산정권 당국은 전직 목사 강양욱을 시켜 교계 일부 인사들을 포섭하여 교회 안에 내분을 일으켜 파괴공작을 펴기로 계획하였고, 그래서 그 기관으로 기독교연맹이라는 것을 출현시켰다. 이에 공산당들은 신학교 교장을 비롯한 교수들과 교역자 또는 신학생들까지 더구나 평신도들도 가입을 강요하는 공작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교장은, 기독교연맹에 가입을 거부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교수는 물론 학생들까지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김인준 교장은 1947년 1월 17일 소련군 사령부 특무대에 연행되어 간 후로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신학교 건물도 압류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저들 못지 않게 교회들이나 이성휘 목사 같은 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국 선교의 원훈인 마포삼열 목사의 은공을 기리기 위하여 평양의 경창리에 한 건물이 있었는데 이것이 마포기념관이었다. 이곳으로 교사를 옮기고 이목사는 교장의 직임을 수행하여 갔다. 그러나, 이 건물마저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다시 부임하여 시무하던 서문밖교회로 교사를 옮겨 여기서 교육하였다.
이와 같이 교사를 압수한 공산당들은 그 소름끼치고 끔찍한 6.25를 계획한 전쟁준비기관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1950년 1월에 공산당은 북한 민주사상 중심체인 평양장로회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강제 폐합, 어용기관인 기독교도연맹 산하 신학교인 소위 ‘기독교 신학교’란 학교로 변조시켰다.
이런 파국에 이서휘 목사는 경건회 시간만 되면 2층 본당 예배실에 올라가 울음을 터뜨리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투옥된 종들의 자유을 위하여, 학생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매달려 울부짖었다. 이때에 이 목사는 늘 시편 24편의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광의 임금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임금이 뉘시냐?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여호와시로다”를 힘차게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이는 환난과 핍박의 시기가 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광의 날이 올 것을 의심없이 확신하면서 참고 기다린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였다.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가장 많이 불러서 보지 않아도 다 따라 외면서 눈물과 결심으로 부르곤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산치하에서 목회자이면서 교수로서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장의 중책을 맡아 목숨걸고 봉직하다가 저들 공산당에 반동분자로 몰려 정치 보위부에 연행되었고 유엔군에 의해 6.25동란에 후퇴하던 저들의 평양 탈환 직전에 우익 인사들의 대학살사건 때 함께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것을 안 1957년 이목사의 모교인 미국 샌프란스코신학대학원은 강당에 “이성휘 박사 순교 기념패”를 안치하였다.
이종덕(李種德)
교단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6.25를 맞아 순교
(1884-1950, 충남 공주 출생 침례교 목사 동아기독교 2대 감독, 6.25 사변중 공산군에게 피살, )
이종덕목사는 1884년 6월 15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영리에서 이세영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린시절은 7살부터 1904년 13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나이 24살 때인 1907년 칠산교회의 장석천에서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910년의 한창 젊은 나이였지만 이 나라의 현실은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나라잃은 울분에 터지는 듯 아픈 가슴을 안고 담담하고 절망적인 현실의 탈출구를 찾아 방황하다가 우연히 함경도 원산에 가게 되었다. 여기서 이종덕은 선교사 펜윅을 만났다.
이종덕은 이 펜윅에게 6개월간을 직접 성경을 공부했고 전도를 시작했다. 1911년에 정식으로 ‘동아기독교회’ 교사 직분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설립했다. 1912년에 10월 경북 산점교회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그의 뛰어난 신앙생활과 인품을 인정받고 1914년 12월에 원산에서 펜윅의 후임으로 그를 제2대 감목으로 지명하였다.
1937년 이르러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지만 이를 끝까지 거부한 목사들 중의 한 사람이 이목사였다. 그 후 이목사는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1938년 2월에 만주 봉황성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가 이후 8년간을 남,북만주를 두루 순회하면서 교회를 돌보다 일제의 패망과 8.15 해방을 맞아서 서둘러 귀국하여 그동안 닫혔던 교회의 문을 열고 교회 재건에 앞장서서 진두지휘하였다.
교단 총회가 강경에 있었음으로 강경을 중심으로 교단의 총회사무실을 지키면서 미국남침례회와 연결을 맺어 1950년에는 선교사 애버나티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애버나티를 맞아 교단발전에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러나 애버나티 선교사가 부임한지 불과 4개월만에 6.25사변을 당하게 되었다. 애버나티 선교사는 강경에 공산군이 도착하기 전에 가족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다른 동역자 목사들도 서둘러 피난길에 오르자 이 목사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을수 없었다. 게다가 피신을 강권하는 사람들이 있고 보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목사는 ‘주여! 종이 이 수난에 맞서 산하 교회와 교단의 책임을 맞기셨아오니 죽음으로써 이를 지키며 직분을 감당할 용기도 믿음도 주소서!”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끝내 총회를 지켜 나갔다. 공산군이 밀려와 온갖 고난은 시작되었다. 그러던 몇 날이 지나 9월 28일 서울 수복의 기쁨의 소식을 접하면서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금강 강변 백사장에 붉은 피를 쏟으면서 총살되었다.
이태석(李泰錫)
교회 폐쇄에 저항하다 6.25때 순교
(1901-1950 평양 하나님의 교회 목사. 금산,강경,군산,평양에서 목회. 6.25사변중 평양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평양 출생)
이태석목사는 1901년 평양에서 이씨 가문의 귀한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적 인재를 양성배출한 명문사학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는 더 큰 학문적 희망을 품고 일본을 유학하여 대학과정을 마쳤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다시 목회에 뜻을 두고 서울로 상경하여 현재의 서울 신학대학의 전신이었던 당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을 마치고 그의 나이 32살되던 해인 1932년 졸업을 했다.
1931년 그는 신학교를 졸업반으로 성결교 전도사로서 충청남도 금산교회에 목회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졸업한 다음해인 1933년 같은 고장 충남 강경읍의 강경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6년에는 전북지방으로 임지를 옮겨 군산교회에 부임하여 목회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평양 상수리교회 소속으로 새로 창설된 하나님의 교회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이곳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편 평양 상수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변남성 목사가 3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태석목사는 변목사의 뒤를 이어 상수리교회를 열심을 다해 섬겼다. 여기서 그는 감격의 8.15을 맞았다. 그러다가 1950년 시내에 있는 산양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6.25가 발발하게 되었다.
한편 이태석목사는 일찌기 학생이긴 했지만 3.1운동 때에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주도하기도 해서 일제의 감시를 받았으며 해방이후에도 공산정권에 끝까지 불법적 처사에 맞서서 항거하는 일을 계속해왔다.
공산치하에서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공산당에게 붙잡혀 갔으나 이목사는 용케도 피할 수 있었고 사변직후 공산군은 전시체제 하에서 당분간 교회폐교가 불가피하다고 하며 협조하라고 일방적 통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태석목사는 끝내 이를 거부하다 공산군에게 끌려가 평촌리 야구경기장에서 총살을 당하여 순교의 영관을 쓰게 되었다.
정용현(鄭龍鉉)
공산치하에서 신앙을 지키다 투옥, 순교
(1903-1950 성결교 목사, 교육자,순교자,황해도 은율출생)
정용현 목사는 1903년 2월 7일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하여 일찌기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 신성학교는 철저한 기독교 교육과 근대주의적 사회로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사람의 지혜를 열어주었다. 정용현은 이곳에서 모든 사상 풍속의 발달을 도모하여 민족자존의 강력한 인재양성을 학교의 이념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그것이 정용현의 신앙생활에 크나큰 힘이 되었다.
1932년 갖 서른살 나이에 목회를 시작하여 처음에는 성결교단에서 전도사로서 봉직하였다. 정전도사는 평양으로 그 소망하던 길이 열려서 부르심을 받고 유동교회(후에 교구정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부임하던 바로 이듬해인 1933년 경성신학원을 지망하고 목사가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지금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이었다. 1936년에 성결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937년에 다시 고향 땅인 황해도로 돌아와서 사리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황해도에서의 사리원교회는 성결교회에서 1926년 6월 이준수와 변남성을 파송하여 전도함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들이 성결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사리원에 [하나님의 교회]를 개척 설립하게 되자 공석 중인 이 자리를 정 목사가 부임하게 되어 그 뒤를 이어 사리원교회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말기 성결교단 강제해산으로 교회는 폐쇄의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2년 이 동산 교회를 섬기던 중에 해방이 왔고 일제는 패망하였다.
해방 후에도 계속 선천에 머물면서 동산교회에서 그대로 시무하게 된 것이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후 공산정권의 박해 속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기도로 현실을 이기면서 언제나 순교라는 것을 이미 각오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른바 1946년 11월 3일의 주일선교라든가, 공산당의 어용기관인 [조선기독교도연맹] 또는 그 밖에도 신학교의 폐교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니, 1943년 일제하에서 교단이 해산되고 그때도 각 교회당이 가마니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모아 소각하기도 하였으며, 이때에 성결교회에서는 박봉진 목사, 정태희 장로, 김지봉 집사 등 3명이 일제 고문에 의해 순교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공산치하에서의 신앙생활이란 그 몇 배나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낫지를 못했다. 이런 공산치하에서 1947년 7월에 저희에게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한번도 출옥하지 못한 채 6.25가 발발되었고 기세승등하게 남진했다가 1950년 10월 평양을 비우고 패주하면서 공산군의 반화로 그 와중에 옥사하였다.
정인태(鄭仁泰)
신앙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죄로 순교
(1917-1950, 순교자 전남 함평 출생)
1917년 전라남도 함평 지방에서 전도사인 정재련과 김장산 부부 사이에서 차남으로 정인태가 태어났다. 그는 장성해가면서 매사에 침착하면서 대담한 남자다운 성격을 지녔다.
정인태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서울 동자동에 있는 조선 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의 신학수업을 마치고 전북 정읍지방 교회를 담임하여 목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에 전남 무안군 몽탄지방의 몽탄교회에 부임하여 1950년 4월달에 목포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안수받던 날 정목사는 일사각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지기로 서약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때부터 두달 뒤에 6.25가 터졌다. 제대로 방어도 못한 채 당하기만 하면서 남한일대를 거의 공산군에게 내어주게 된 것은 이곳 몽탄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7월 23일은 주일이었다.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돌아왔고, 갑자기 오싹 냉기가 도는 듯한 불안한 분위기는 아침 일찌기 예배를 드리러 모인 교인들에게서도 읽을 수가 있었다. 정 목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처하자고 당부한 후에 교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목사는 종이 깨어지라고 힘껏 치면서 속으로 이 세상에 마지막 치는 종이 될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 교인들은 어느 때보다 더 빨리 많이 모였다. 정 목사는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찬송으로 예배는 시작되었다. 정목사의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 모든 성도들에게 용기를 더해주는 기도였고 말씀 또한 그러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돌아가는 교인들의 손을 일일이 붙잡고 부디 무사하고 믿음 안에서 평강을 비는 듯 굳은 악수를 하였다.
여름 한낮 해도 어느덧 비껴가고 땅거미 드는 저녁무렵 저녁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려고 막 문을 열고 나서는데 낯선 청년 두 사람이 앞을 가로질렀다. 당신이 목사냐고 묻고 자기네는 해방군인데 교회를 저희 막사로 쓸 터이니 그리 알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이 건물에 출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오륙십명 가량의 해방군이라는 사람들이 몰려 왔다. 정목사에게 있어서 마지막 예배가 될 것이라곤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교인들은 자기들 걱정보다는 목사님을 걱정해 속히 몸을 피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불안한 근심을 목사님이 좀 덜어달라는 소원들이었다. 그래서 바닷가의 조그마한 굴이 있었는데 몸 하나 우선 피할만한 곳이었다. 마음이 허락지 않으나 교인들의 간청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계속하여 머무를 곳은 못되었다. 생각다 못해서 간들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생각한 곳이 어린 시절의 고향이기도 하고 지금은 처갓집이 있는 함평군 가덕으로 가리라고 작정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 소꿉 친구들이 있는 곳이니 가장 안전하게 감싸주리라고 생각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너무나 자기가 누군가를 잘 알고 있는 그 친구들 손에 잡혀서 신광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팔에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내무서 뒤뜰로 나왔다. 정 목사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하나님! 이 민족의 죄를 언제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완장을 두른 청년의 팔에 정치 보위부라고 쓴 완장이 있었다. 이 정치보위부원이라는 자가 ‘여러분 이제부터 정인태에 대한 인민재판을 이곳에서 개정합니다.” 라고 말하자 앞에 서 있던 자들이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며 외쳤다. “반동 분자는 죽여라! ”이것이 재판의 전부였고 인민의 이름을 팔아 이미 저희 계획대로 1분도 못되어서, 끝나고 유치장에 구금되어 집행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추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탈출이다. 1950년 10월 10일 허술한 경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정목사는 필사의 걸음으로 불갑산 속 굴 속으로 들어가 겨우 저희 눈을 피했다. 추위와 굶주림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시편 54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나 퇴각선이 유엔군의 인천 상륙전의 성공으로 찬단된 인민군은 이리저리 뛰는데 이곳 불갑산 쪽으로 몰려왔다. 찬송하며 기도하는 소리에 달려온 쫓기는 무리에게 발각되어 그 무리 속에는 어릴 때 친구도 있었으나 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찬송을 부르면서 죽창으로 난자당하는 상처마다 피를 쏟으면서 10월 24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번개 천둥 속에 억수처럼 2시간이나 비가 쏟아져 피를 씻었다고 한다.
조상학(趙尙學)
일제에 투옥되고 공산당에 순교당한 목회자
(1877-1950 장로교 목사,순교자.)
조상학목사는 1877년에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서 양반집 조형섭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생활정도도 풍요롭고 행세하는 양반의 가문에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별 어려움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믿음의 저력과 끈질진 한 사람, 붙잡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전도인이요, 조사였던 지원근이 있었다. 또한 지원근 조사와 함께 물러설 줄 모르는 한 사람 서양인 선교사로 오웬(Owen,Clement Carrington)이 있었다.
조상학이 아무리 고집센 젊은 선비라고도 해도 오웬이나 지원근 같은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한 오웬은 1898년 11월에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벨(Eugene,Bell:배우지)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를 시작하는 한편 목포진료소를 개설했고, 의사이기도 한 그는 광주선교부를 시작하여 순천, 광주, 목포 등지를 순회하며, 의료 및 복음선교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으로 그때만 해도 그 신기하기만한 서양 의학의 기술이었다.
이런 헤택을 주는 이 선교사가 비록 이국적인 외인이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유식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조상학은 그들의 학력과 인격에 끈질긴 전도를 외면할 수 없어 드디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16년에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각 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중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입학하여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을 하고, 바로 그 해 순천노회가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하면서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아 광양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또 순천노회의 최초의 총대가 되어 제12회 총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율촌교회,1940년에는 경남하동읍교회, 1946년에는 여천 덕양교회에 서 시무하였다.
조목사는 1940년 신사참배에 불참하고 항거할 것을 뜻하고 애국적 신앙사수의 목적으로 힘으로 모아 조직적으로 반대할 것을 결의한 조직체였는데,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중에 이 민족에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그 굴욕적이고도 치욕스러운 결박에서 해방이 되는 날은 왔다.
그러나 북한 땅은 공산정권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이제 우리 세상인가 하는 날들은 꿈결같이 사라지고 민족적 사상이 좌우로 갈려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6.25가 터졌다. 남단 이곳에도 공산침략의 태풍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제직들의 강한 권유로 피신을 종용했으나 강권을 뿌리친 채 막무가내로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대신 희생할 테니 나의 시체는 저 산에다가 묻어주시오” 굳은 결의로 주의 피에 참례하는 성찬을 베풀고 난 그후 얼마 안되어 여수 내무서에서 보낸 3명의 서원에게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70일을 감방생활을 하고 그 해 9월 28일 10리 밖에 있는 미평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이 날 함께 동역하던 손양원 목사의 뒤를 따라 그 날 같은 곳에서 손 목사의 순교를 보면서 그 뒤를 따라 살해되니 73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썼다.
자료출처 : 한국 기독교 인물 (www.kcm.co.kr)
경향신문 2000년 6월 7일
<한국전쟁 50년>(6)북측에 의한 학살(下)
◎ 양민 및 기독교인 학살=50년 9월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부락에서는 기독교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인민군은 30여가구의 기독교인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부역자들에게 가가호호 방문, 잠자리에 든 교인들을 몽둥이와 죽창으로 살해했다.
50년 8월10일 전남 영암군 군서면 양태마을 한 주막집에서 인민군은 주민 32명을 가두고 불을 질러 모두 소사시켰다. 최남두씨(76.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는 “당시 억류되어 있던 어머니에게 밥을 갖다 드리기 위해 주막집을 찾아갔으나 불길이 거세게 번져 어머니를 만나 보지도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또 인민군은 영암군 관내 교회를 찾아다니며 80여명의 목사와 장로, 일반 교인들을 미국인과 내통한다는 구실을 붙여 살해했다.
50년 8월6일 전남 강진군 강진읍 고내리 5일장에서 배영석 목사 등 3명을 공개 처형하기도 했다.경북 문경시 점촌읍을 점령한 인민군은 주민 48명을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문경경찰서에 억류해 놓았다가 50년 9월25일 이들을 앞세운 채 충주 방면으로 퇴각하던 중 다음날 오후 9시쯤 점촌읍에서 28㎞ 떨어진 문경읍 이화령고개 중턱에서 주민들을 도로변에 일렬로 앉혀놓고 사살했다. 당시 아버지와 함께 끌려가던 김일현씨만이 피로 물든 시체더미에 깔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48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 한국전 직전의 학살=경북 포항시 송라면 지경리에서 50년 2월4일 오후 8시40분쯤 50여명의 빨치산이 마을을 습격, 2시간여 동안 집집마다 불을 질러 주민 34명이 숨지고 6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앞서 49년 11월29일 밤 경북 경산시 와촌면 박사동에서도 무장공비들이 마을 주민을 한군데 모아놓고 불을 질러 38명이 죽고 가옥 108채가 불타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 두 사건은 빨치산이 잠입하려다 주민들의 신고로 사살된 데 따른 보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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